제4장
이름을 부르자마자 여인의 모습은 골목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신이 무슨 무서운 괴수라도 되는 것처럼.
정령은 편의점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휴대폰 속 잔액을 확인했다. 아직 새집을 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오로지 주윤우에게만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
어쩌다 돈이 좀 생겨도 전부 그의 선물을 사는 데 써버렸다.
역시, 호구는 마지막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정령은 무표정하게 휴대폰 속 터무니없이 비싼 부동산 매물들을 쳐다봤다. 큰 건수를 하나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정 선생님! 지금 어디 계세요? 어젯밤에 제가 폐를 끼쳤는데, 주소 알려주시면 지금 바로 찾아갈게요.”
정령은 주소 한 줄을 불러주었다.
15분 후, 눈이 호두처럼 퉁퉁 부은 차소아가 정령은 앞에 섰다.
그녀는 더운지 땀을 뻘뻘 흘렸고, 이마 앞 잔머리 몇 가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정 선생님, 어떻게 말도 없이 가버리세요. 제가 재빨리 전화번호 저장해 둬서 다행이지.”
차소아는 생수 반 병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리며 원망 섞인 눈빛을 보냈다.
정령은 눈썹을 까딱했다.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차소아가 다시 바싹 다가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정령은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부동산 정보를 발견했다.
“역술가님, 집 구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물어보시지. 저희 아빠가 해성시에 집이 몇 채 있거든요.”
차소아가 휴대폰을 꺼내 어떤 파일을 열자, 정령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파일은 총 50페이지였고, 각 페이지마다 집 한 채씩, 그것도 모두 번화가에 위치한 집들이었다.
이렇게 무심하게 부를 과시하는 얄미운 사람은 처음 봤다.
저게 어디 몇 채라고 할 수 있나?
정령은 자신이 물려받은 낡아빠진 도관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녀는 차소아네 집 매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그녀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은 단 한 채뿐이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이걸로 하죠.”
차소아는 당장 그녀를 데리고 집을 보러 가려 했다. 하지만 택시에 올라탄 정령은이 휴대폰을 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다음에 가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차소아는 아쉬워하면서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약속 잡아요. 근데 정령은 씨, 혹시 호텔에 묵기 싫으시면 오늘 바로 그 집에 가서 지내셔도 돼요. 집 엄청 깨끗하거든요. 돈은 안 받을 테니….”
정령은 문을 닫고,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씨 집안의 본가는 해성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는데, 산수가 수려하고 녹음이 우거진 곳이었다.
정령은 이곳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정령은 씨?! 어떻게 오셨어요?”
찻상을 닦고 있던 하인이 정령은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주씨 집안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주윤우가 정령은을 좋아하지 않으며, 정령은이 일방적으로 매달려 시집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주연서 아가씨와 주윤우의 어머니가 대놓고, 또 은근슬쩍 비웃어대니, 하인들까지 덩달아 정령은을 무시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만 예쁘면 뭐 하나? 결국 남자 하나 붙잡아 두지 못하는데.
하인은 속으로 침을 뱉었다.
정령은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쓱 훑었다. “주씨 집안이 언제부터 하룻강아지한테 보고해야 했지?”
“정령은 씨, 지금 욕하시는 거예요?”
하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분노에 차올라, 허리에 손을 얹고는 꼭 길거리에서 싸우는 아낙네 같은 자세를 취했다.
“제가 비록 하인이지만 사모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요. 그에 비해 정령은 씨 당신은, 시집온 지 2년 동안 도련님과 합방은 해봤어요? 남자 하나 못 휘어잡으니까 우리 같은 하인들한테나 화풀이하는 거 아니에요….”
하인은 투덜거리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정령은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녀는 비꼬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주씨 집안에 대한 조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이 우스워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이것 봐라. 내 것도 아닌 남자 하나 때문에, 이제는 하인까지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행패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하인은 계속해서 욕을 퍼부었다. 정령은이 어떻게 손을 봐줄까 고민하던 그때, 한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뭐가 그리 시끄러워?”
주윤우의 어머니가 딸 주연서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부인은 수수한 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고상하고 기품이 넘쳤으며 두 눈은 날카롭고 엄격했다.
하인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든든한 뒷배라도 만난 듯 공손하게 말했다. “사모님, 정령은 씨가 왔습니다.”
주씨 집안에 시집온 지 2년이 지났지만, 그녀에게는 주씨 부인이라는 호칭조차 없었다.
‘정령은 씨’라는 호칭은 주씨 집안 전체가 그녀를 외부인 취급하며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정령은은 자신이 불쌍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윤우의 어머니는 정령은을 차갑게 쳐다보며 호통쳤다. “시집온 지 2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근본 없는 집안 애처럼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정씨 집안이 참 딸 하나는 잘 키웠어!”
주연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경멸 가득한 눈으로 거들었다. “정령은, 전에 말했잖아. 본가에 올 때는 미리 보고해야 한다고. 우리 오빠랑 결혼했으면 규율은 지켜야지….”
정령은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딱 자르며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이 댁이 언제부터 당신들 마음대로 하게 됐는지 몰랐네요. 그딴 소리 집어치우시죠. 저 주윤우 씨랑 이미 이혼했어요. 지금은 주 할아버님의 초대를 받고 온 손님이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이게 그 대단한 명문가의 손님 접대 방식인가요? 웬만한 소시민 집안보다도 못하네요.”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조롱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몇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주윤우와 정령은이 이혼했다고? 진짜인가, 가짜인가?
주윤우의 어머니는 정령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혐오스러운 눈빛을 띠며 낮게 꾸짖었다. “말버릇하고는! 하지만 이혼하길 잘했지. 2년 동안 알 하나 못 낳는 주제에!”
주윤우의 어머니가 정령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악독한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정령은은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사람이니 당연히 알을 못 낳죠. 그런데 주 사모님께서는 주윤우라는 알을 낳으셨나 봐요?”
“방자하구나!”
주윤우의 어머니는 분노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고, 주연서가 급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령은을 흉흉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정령은,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우리 오빠 불러서 너 손 좀 봐달라고 할까? 원래 이혼 위자료라도 좀 챙겨주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차라리 개한테 던져주는 게 너한테 주는 것보다 낫겠다!”
마치 적선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정령은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주윤우의 어머니 왼쪽 손목에 채워진 염주에 닿았다.
순간 눈빛이 멈칫하더니, 다음 순간 그녀가 말했다. “주 사모님, 저를 그렇게 무시하시면서 제가 드린 물건은 아직도 차고 계시네요. 제가 이걸 천박하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주윤우의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 몸이 계속 좋지 않아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았고, 늘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정령은이 구해온 염주를 차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건강해졌으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주윤우의 어머니는 시커멓게 굳은 얼굴로 염주를 잡아챘다. 그리고 ‘탁’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상하게도 염주 팔찌가 바닥에 닿자마자, 구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굴러갔다.
“내가 네까짓 싸구려 구슬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더냐? 윤우 얼굴 봐서 차고 있었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거다.”
정령은의 마음은 고요한 연못처럼 잠잠했다. 그녀는 주윤우의 어머니에게서 급격히 쇠락하는 기운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당겨, 소리 없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멍청이.
천재 역술가가 직접 기원한 염주는 보통 염주와는 다르다. 사람의 평안과 건강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수명을 늘려 장수하게 하는 힘까지 있었다.
망가졌으니 그것도 잘된 일이다.
정령은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과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할아버님께 전화를 걸려던 참에, 바깥 대문이 열렸다.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령은이는 내가 부른 사람이다. 누구 불만 있는 사람 있나?”
